머 리 말
David Birnbaum의 God and Evil은 강력하고, 잘 알려져있으며, 자비로운 신에 의해 창조되고, 지속되어온 세계에서 근본적인 악의 성가신 문제에 무엇보다 중요한 형이상학 적 해결책을 제공하기위해 시도한 대담하고 아주 독창적인 시놉시스 입니다. 포스트홀로코스트 세계에서의 유대인 신정론의 극도의 위협적이고 정서적 고통에대한 문제의Birnbaum의 치료는 대담하지만 세심하고, 전통적이지만 매우 혁신적입니다. 작품은 전통과 현대(정통과 비정통)의 유대인 소스의 Gersonides, Isaac Luria, Rav Kook , Rav Soloveitchik와 같은 이들에서 영감을 그릴 뿐만 아니라, Aquinas와Irenaeus와 같은 예상치 않은 부분에서 부터 까지 다수를 아우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진정한 유대인, halakhic의 관점의 변수 내에 머물도록 합니다. Birnbaum의 책은 하나의 지적 모험입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한번 읽으면 매우 분명히 됨으로, 매우 열정적이고 정서적인 탐구입니다. 저자는 그의 지속적인 신에 대한 믿음에 약혼하고(Hosea 2:21-22), 모든 그들의 길에서 유대인들을 보호함을 약속하고(Psalms 91:11), 천 세대까지 친절과 자비를 계속한 이와 (Exodus 34:6-7), 죽음에까지 “잠겨”된 신생아들의 현실과 살아있는채로 불속에 던져지는 아이들과, 그들의 눈과 척추와, 뇌에 화학물질이 주입되고 잔혹행위의 일부가 나치 유럽에서 신의 사람으로 인하여 경험이 되었다는것에 있어 자신이 깊이 (우리 모두 그러듯) 현저한 대조로 인하여 매우 고민에 빠져있었습니다.
Birnbaum의 접근의 독창성은 그의 철학적 출발점에서 자명하였습니다. 신의 속성과, 명백한 악의 특성을 조정하는 가능성에 처음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Birnbaum은 “인간의 목적”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가 믿는 질문은 궁국적인 목적, 그리고 물론, 신의 기원에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지휘함으로 답변을 얻을수 있습니다. Birnbaum, 오래된kabbalists같이, 우주의 창조주의 기원의 문제를 제기하는것에 도전하고, 그의 시각에서 그 문제란 땅에서 자라야만 하는 그 정확학 해결책은 악의 문제에 있어 진정한 의문의 불가피한 기본지식 입니다.
Birnbaum이 제안한 신의 기원의 질문에 대한 해결책은, kabbalists의 En Sof (이스라엘의 신을 일으키는 영원한 유신 원리)는 “신성한 잠재성은 신의 핵심에 있음” 인것의 미스테리로, 신은, 그의 본성에 따라, 잠재성과 가능성, “초월, 우주, 시간 그리고 우주”, 그리고 더 큰 사실을 향해 급증하는것 입니다. Birnbaum은 그의 논지를 부분적으로, 신은 모세와 이스라엘에 처음 알려지지게된 이름에서: Eheye Asher Eheyeh, “나는 스스로 있는자이다” (출애굽기 3:1314), 그가 잠재성은 신의 신성한 상태임을 주장하기 위하여prooftext로 본것을 근거로 하였습니다. Birnbaum은kabbalists의sefirot를 “공허”에서 “어떤것”까지 의 차이를 연결하고, 창조의 수단이 되는“잠재성에대한 원초적 탐구”로 보고있습니다.
우주의 태고의 요지로의 “신성한 잠재성”의 의미는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그의 첫번째 성경의 지시 Peru u'rivu, “생 육하고 번식하라” (창세기 1:26)에서 압축하고, 그의 우주 목적으로 그 자신의 잠재성의 성취를 가지는 그런 사람입니다. Birnbaum은 2가지 가능성에서 인류의 잠재적성의 표현, 그러나 상호 배타적으로, 에덴동산에 대치된 힘들의 세트들을 보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삶/행복의 나무”의 힘은 부유하지만 자유가 없는 존재, 신에 대한 의존, 영원한 생명, 악을 지배하는 그러나 성장을 위해 잠재성을 제한하는 힘, 두번째로, “지식/가능성의 나무”의 힘은 삶의 고뇌, 자유, 프라이버시, 책임, 독립, 그대로의 악과 사망률, 그러나 성장을 위한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합니다. Birnbaum에 의하면, 이 두가지의 힘들은 처음에 참여하는 경우에 한하여, 그는 두분째에는 참가할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상호 배타적입니다. 영원한 자유/잠재성의 삶은 신과 개인의 불멸에 대한 의존도와 논리적으로 공존할수가 없습니다.
사실상 신과 같은 그 사람은, 그의 잠재성의 실현이라는, 그의 핵심의 본질을 가지고 있고, 이는 본질적으로 기정 결론 이며, 창조의 행위 자체에 기록, 그 사람은 과일을 먹는것으로 에덴에서 추방되어야 하며, 그리고 지식의 나무의 힘을 채워야 합니다. 보통 말하는 그런, 자연과 윤리의 악 모두는 전염병과 인류에 도전하는것과 같이 영원할것입니다. 사실, 그의 개인과 집단 레벨 모두에 있어, 선을 위한, 잠재성을 가득 채우는것에 대한 가능성은 자연악(사람의 자원에 대한 도전과 같이)과 윤리악(그의 자유에 대한 도전과 같이) 모두의 가능성에 입각하였습니다.
인류는 그의 영적, 지적, 그리고 다른 잠재성에 목적성취를 위하여 가까이 옵니다, 그는 창조에 있어 신과 함께 파트너로서의 그의 역할을 통해 지구에서 그의 목적 성취를 위하여 가까이 옵니다. 이렇게, 그러나, 사람은 그의 프라이버시, 독립 그리고 자유를 반드시 극대화 해야합니다. 인류로서 그리고는 자신의 자아실현에 근접하도록 나아가고, 신은 반드시, 당연히, 점점 더 “이클립스”로 후퇴하여야 합니다. 수세기동안 인류는 지식에있어 크게 발전하였고, 내재적인 수요들이 많아졌고, 그리고 자유가 증가하였습니다. 신을 위해 인류의 발전에 있어 이 후기단계에서 인사에 있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것은, 그가 했었던것 처럼, 예를들어, 이집트에있는 유대인들을 위해, 그의 그리고 인류의 본질 모두의 발전을 역전시켰으며, 그리고Birnbaum의 관점에서, “우주를 푸는것”으로 위협하였습니다.
편집장
NY Jewish Review
1990년 2월
머 릿 말
by Daniel N. Khal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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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철학은 종종 신과 우주는 인간의 지적능력으로는 이해할수 없는것으로 기본적으로 설명이된 가정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유대인 철학의 의문은 거의 검증같은것이되지 않은 이해하기 힘든 체계의 맥락안에 일반적으로 위치하여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주의 윤곽과 영원한 것에 대한 후자의 관계와 함께하는것보다 종종 세상에서 사람의 위치, 역할, 그리고 의무에 집중이 되어있습니다.
“[유대철학의 이유] 는 우리가 체스에서 찾을 수 있는것과 같은 이유입니다…체스는 계산을 위해 최대한의 가능한 범위를 제공합니다…그러나 이 모든것은 어떤 수들은 허용되고 어떤 것들은 아닌, 그리고 어떻게 그 말들이 정해져 있는지를 결정하는 규칙들의 하나의 세트에 따라 발생합니다. 그들은 질문되지 않으며 그들이 정의되기 위해서 필요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체스의 합리성은 규칙이 정해진 이후에 시작되기 때문입니다…이는 유대인의 지식… [그것은] 한계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연루된 자만감, 제한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 Michael Wyschogrod, The Body of Faith I, 3.
[italics mine]
물론, 이 일반화에 대한 저항에 대한 주목할만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Maimonides는 아마도 가장 눈에 띄는 예인 - 만약 어려운것이 아닐 경우 - 유대교의 기본 추측을 분석하는 유대인 철학자 입니다. 그의 Guide of the Perplexed에서, Maimonides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주로하여 설립된 우주의 이해를 긴밀히 딱 들어맞는 유대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Maimonides가 유대교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의 빛으로 가지고 있는동안, 그는 단지 한 가지 -영원주의에 대한 질문을 제외한, 모든 주제에 대한 일치를 찾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원주의자’로, 우주는 영원하고 신은 어떤 시점에서 실존으로 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Maimonides는 그 반대를 주장하였습니다: 신은 영원하고 우주는 적극적으로 구체화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신과 인간 모두의 본질을 포함한, 광범한 주제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받아들인 Maimonides에, 신과 우주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아르스토텔레스와 동의를 할 수 없는것에 있어 충격을 주었습니다. Maimonides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우주에의 신의 관계를 마주하는 그들의 각각의 위치를 증명하는것을 주장하지 않은것은 매우 놀랍습니다. 마치 두 사람이 여행의 끝에서 그들이 각각 추정하는 것으로 오직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럼없이, 완전한 합의 하에 철학의 깊이를 함께 조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양쪽 모두 이 여행을 완성하는데 필수적인 놓친 도구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양쪽 모두 그들을 이 지점까지 데려온 그 생각-과정을 버림으로 각각 예상치 못했던 사항들을 인정합니다.
“논쟁거리가 없거나, 의견에 있어 매우 괜찮을때 있어서는,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런걸까요? 예를들어, 우리가 이야기할때: 세상은 영원한걸까요, 아닌가요?”
– Aristotle, Topica I, 11
“세계의 영원함이나 이 시간의 창조는 하나의 미결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 의견에 따르면, 이는 증거없이 받아들여질수 있습니다… 이는 추측에 응해주는 힘이 아닙니다. ”
– Moses Maimonides, Guide of the Perplexed, II, 16
이는 David Birnbaum이 포럼에 들어가는 시점에 있습니다. 그는 신이 우주에 그리고 우주가 영원에의 관계를 동시에 이야기 하는 통합된 형이상학의 신과 영원의 맥락 사이에서 관계를 기술하는것에 의해 합니다.
철학을 설명한 그의 첫 번째 작품, God and Evil 입니다. 이는 세상에서의 총 악의 존재를 이해하는 일을 위한 토대에 있는 동시해결입니다. Birnbaum의 것은 1988년에 출판되어 18년동안 거의 전적으로 돋보적으로 남아있는 해결책입니다. 현 작업,God and Good,에서 Birnbaum은 형이상학의 의미에서 더욱 지켜보고 있고, 개인이 중심이 되는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각각은 우주 진화의 엔진으로 밝혀졌습니다. 사람에게 신, 사람에게 우주, 사람에게 영원의 관계는 이 문제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Birnbaum은 그의 이지적인 전임자들이 따르던 그 규칙에 복종하는 것에 대한 충동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고대 유대인의 원칙에 기초한 건물, 특히 Kabbalistic에서, 그는 형이상학 문제, 아니면 철학에서 미개척 분야로 남아있는 다른 과학적 그리고 인문적 분야에서의 통찰력에 적용해야 하는 시간적 순환, 생물학과 물리학에서의 컨셉에서의 동양의 원리를 그리는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주의 본질을 특성화 시키는 예전의 시도들을 주장하는것은 그들의 적합한 개념의 Maimonides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착에 의해 전형적인 아스날의 결핍은 충분하지 않아 왔습니다, 그는 형이상학 ‘도구들’의 세트로 정의되는 이 다방면에 걸친 영향을 굳혔습니다. Birnbaum은 God and Good 의 초기에서 이 도구들을 선보입니다. 그는 이 영향은 초기에 파생된 모든 아레나에서 적용된 모델을 만드는데 사용합니다.
Birnbaum의 오리지날– 매우 쉬운 – 원칙의 영향, 따라서 가장 일반적인것에서 가장 세부적인것까지. 원칙은 무한한 잠재성은 개인과 우주 모두를 신의 이상을 향해 당기는 주요논점으로 인해 통합됩니다. 잠재성은 일반적입니다. 잠재성은 결합입니다.
“인간의 정신 세계에서 큰 고통을 주는것중 하나는 모든 지식의 규율, 모든 감정, 다른것들의 부상을 방해하는것 입니다…이 결함은 영원히 계속될수 없습니다. 소리의 영적 상태로 그가 발전 시킬때 사람의 귀중한 미래는 운명이 되어 옵니다, 그래서 다른이를 부정적인 규율 대신에, 모든 지식, 모든 감정들은 그것의 어떤 지점에서부터 구상될것입니다..영적이지 않은 현상은 개별적으로 일어날수 있습니다. 개개인은 모두에 의해 퍼져듭니다.”
– Abraham Isaac Kook, Lights of Holiness, I, p. 22
흥미롭게도, 그 참신함에도 불구하고, Birnbaum에 의해 서술된 패러다임은 같은 영향에 의해 억제되었었던 이전의 유대인의 관점보다 성서와 탈무드의 개념안에 단단히 박혀있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신의 “나는 스스로 있는자이다” (출애굽기 3:14)와 같은 자아일치의식은 아마도 신과의 잠재성의 연관의 God and Good 의 묘사의 하나의 적절한 표현 일것 입니다.
그의 첫 작품에서, Birnbaum은 아담의 에덴동산의 잠재성/무한 성장과 축복/제한된 성장에서 인류의 선택을으로 이를 이해하는것에 대한 딜레마(창세기 2:17)를 꼼꼼하게 분석하였습니다. 다음으로 Birnbaum은 God and Evil 과 God and Good 통해, 전통적 유대인의 이야기에서, 그리고 심지어 유대교의 고유한 계명들에 있어 잠재성의 테마를 나타내기 위해 계속합니다.
God and Evil 초기에 Birnbaum은 강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1) 우주의 기원, (2) 말하자면, 신의 본성, 그리고 (3)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지배된 세상의 모든 악의 존재의 문제를 통합적이고 새로운 해결책을 제공하는것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적어도 여기의 독자들에게는, 기대치는 복잡하고 객관적으로 고려되기에는 매우 추상적인 복잡하고, 난해한 이론을 위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잠재 모델”은 그저 그 반대입니다: 심히 분리되는, 그러나 초기의 3개의 목표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충분합니다.
두번째 책의 프리젠테이션과 함께 이 모델은 4개의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God and Evil 에서, 이는 철저히도 신학과 학술적 신학에 기본되어 있습니다. 둘째, 첫번째의 God and Good 에서, 모델의 형이상학적 의미가 설명되있습니다. 셋째, 두번째의 God and Good 에서, 모델은 형이상학에 맛을 더하고 일상의 인간의 현실의 영역안에 그려진 120 신화적 천사의 형태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의 God and Good 에서 ‘잠재서의 모델’은 자아실현을 위한 현실적인 템플렛으로 변화됩니다.
형이상학이 통합된것으로 넓게 적용 가능하고, 여기에 제시된것처럼 기억되기는 어렵습니다. 모델의 기초는 탄탄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개인적이고 다릅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그 아니면 그녀 자신의 영적 감각을 보안하는 것을 모을것입니다. 정통주의(Orthodox) 유대인에 있어서, 저는 전통적 유대교의 저의 이해를 강화시킨 Birnbaum의 두 작품에서 많은것을 찾습니다.
Birnbaum의 작품의 영역보다 독특한것은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엄청난 표준 문체에서 충분히 설명할수가 없는 인간이해에 끊임없이 호소하는것입니다. Birnbaum은 때때로 God and Evil 의 꽉차고 본질적인 추리를 닮은, 다른때는 정신에 짧은 충격을 주는것과 같은 언어의 앙상블을 사용합니다. 저자는 오직 그 자신의 한계를 표출하는데 형이상학적 미스테리를 열심히 분석하는 철학의 보편적인 스타일을 거부해왔습니다. 관례를 부숨으로서, Birnbaum은 위험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여기에서 보여지는 아이디어의 깊이를 충분히 나타내는것을 불가피하게 실패한 틀에 굴복하기를 거부함으로 동의를 모험을 하였습니다.
시험은 독자의 마음에 있습니다. 세부사항과 의미 모든것을 위해, 이 작품의 핵심은 대단하게도 간단합니다; 잠재성은 실재를 향해갑니다. 이 컨셉은 이질적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이는 자연스러워 보이는가? 만약 Birnbaum이 성공한다면, 독자는 아이디어 안에는 내재된 유기적인 힘을 가지고있다는것을 감지할것입니다. 이 힘은 표준어를 사용하는 일반적인 맥락에서, 그러나 다른사람들 – 특히 개개인의 맥락에서 – 전통적인 설명은 충분치가 않다는 것을 설명될수 있습니다.
Birnbaum은 우주를 움직이는 힘은 각 개인의 마음에서 고동치는것과, 독자로부터의 본능적인 반응은 그 영향을 가득 반영시킬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실현이 되었나요? 웅대한, 일반적,우주 원칙은 그 자신의 이해를 만들어내나요? 그 자체에서 이 인식은 일상생활에 의미있고 실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Birnbaum은 매우 독특한 무언가를 달성했습니다. 그는 매우 간단한 형이상학의 중심물을 일으키고, 독자의 마음과 감정에 대한 고유의 친밀감을 통하여 간직하였습니다.
“입술의 열매를 창조하는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 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
이사야서 57장 19절
Daniel Khalil
Cold Spring Harbor
New York
Daniel Khalil박사는 국립 의료연구소의 과학자입니다.
그는 Long Island University에서Jewish Philosophy을 가르칩니다.
Foreword by Sanford Drob
“God’s 120 Guardian Angels”
Eighteen years in the making, David Birnbaum’s “120 Guardian Angels”, the poetic portion of his new book God and Good, is a beautiful and fitting complement to his 1988 masterpiece, God and Evil. Nearly everything about this new work, with the exception of its genuine excellence, contrasts markedly with Birnbaum’s earlier book.
Whereas God and Evil was discursive, closely argued and philosophical, “120 Guardian Angels” is poetic, highly personal, and mythological. Whereas God and Evil was profoundly serious, “120 Guardian Angels”
is often light and humorous.
Whereas God and Evil spoke with the highest imaginable degree of generality (declaring, for example, that “Holy Potential is at the epicenter of the Divine”) “120 Guardian Angels” can be extraordinarily particular (Guardian Angel #62 is “Snowstorms on School Days, and #88 is “Playing Chess with Your Son”). However, while Birnbaum’s new work is “particular” in the Aristotelian sense that knowledge of the particular brings clarity to the universal, it is hardly particular in the sense of “particularistic” or “parochial”. Indeed, Birnbaum’s angels, while they do seem to have a fondness for Jewish ideas and activities (Guardian Angel #25 is “Lighting Shabbos Candles” and #75 is “Gemorrah Chavrusahs”), are ecumenical enough to include in amongst them #71 “Ju Jitsu” and #89 “Catholic School Marching Bands.”
Birnbaum, in God and Evil, argued that “Holy Potential” is the “primal thrust of the cosmos” and that man, created in the divine image, has as his purpose the actualization and fulfillment of that potential. In this new book, Birnbaum’s angels speak to us directly and inform us precisely how this potential can be attained. Many of the angels, of course, reflect universally acknowledged ideas and values (Guardian Angel #4 is “Freedom” and #5 is “Mercy”), but it is in the more idiosyncratic amongst them (e.g. #44 “Five-Year Old Girls Giggling”, #50 “Putting-the-Kids-to-Bed”, and #58 “Iron Mill Workers”) that we get the sense that the factory of Holy (and human) Potential is really working.
Reading Birnbaum’s book, I cannot help but also view it as a complement to Lin Yutang’s 1937 Confucian classic The Importance of Living, in which the author speaks so eloquently and so spiritually of life’s simple pleasures, like “lying in bed” and “sitting in chairs”. Lin tells us “If you can spend a perfectly useless afternoon in a perfectly useless manner, you have learned how to live.” Birnbaum, in God and Evil, espoused a much more active, and hence Jewish/Western, view of life’s meaning, but here in “120 Guardian Angels” he makes room for such dalliances as “Bubbles” (angel #13), “Kite Flying” (#54) and “Catching the Moment” (#40). There appears to be an appreciation that in matters of actualizing Holy Potential there is, indeed, as Lin Yutang articulated, both “the noble art of getting things done [and] the noble art of [sometimes] leaving things undone.
The Kabbalists, in whom much of Birnbaum’s thinking is rooted (angel #109 is “Lurianic Kabbalah”), held that there is a coincidence of opposites governing both God and humanity; Birnbaum’s latest effort, especially when placed in the context of his earlier one, (with the complementary book titles explicitly forewarning us) most certainly seems to embody this dialectical spirit.
Chayyim Vital, whose great work Sefer Etz Chayyim, is the classic exposition of Lurianic Kabbalah, once acknowledged that the world is for the most part evil, with only the slightest bit of good mixed in. Adin Steinsaltz, the contemporary rabbinic sage and Kabbalist, has said that the full meaning of Vital’s seemingly pessimistic dictum is that “ours is the worst of all possible worlds in which there is yet hope, and that this is paradoxically the ‘best of all possible worlds.’” The reason for this, Rabbi Steinsaltz tells us, is that only in such a world of extreme adversity, a world “on the brink” of total disaster, can humankind be motivated to realize the emotional, spiritual, aesthetic and intellectual possibilities that have been bequeathed to it by our creator.
David Birnbaum’s mythic 120 Guardian Angels are a celestial chorus imploring us to do just that, to realize our full cosmic potential as human beings and thereby act as partners with the divine in actualizing the potential of our world.
Dr. Sanford Drob
May 19, 2006
Founding co-Editor, The NY Jewish Review
www.NewKabbala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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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unified teleology: New Paradigm 21st Century Cosmology, Metaphysics, Philosophy:
Summa Metaphysica presents the David Birnbaum philosophy of Cosmic Potential.
for David Birnbaum philosophy, metaphysics, see also